제목

(제4회 우수상)아버지의 비밀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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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실

등록일

2007/04/12

조회수

2329

내용

제4회 우수상
아버지의 비밀통장

김 란 희 / 서울 중구 신당2동

지금 밖에는 찬연히 비가 내리고 있다. 밤처럼 어두워진 하늘에서 지치지도 않고 비가 내린다. 초겨울 비가 만들어 내는 스산함 때문일까?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우리네 인생에도 어떤 ‘결정적 시기’가 있을 것이다. 마치 나무가 푸를 때가 있으면, 땅에 잎을 떨구는 때가 있고 꽃을 피울 때가 있으면, 열매를 맺을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인생에도 때가 있고 우리는 그 때를 충실하게 매워 가야하는 것이리라.

그러면서 나는 아버지, 올해로 정년퇴직을 하신 아버지를 떠올린다. 생과 멸의 순환과 반복, 생노병사의 인생살이에 대하여 무심할 수 있을지라도 황혼기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딸의 마음이란 이렇게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버지에게서 변화를 느낀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우리 가족들에게는 비밀이 없었다. 아버지뿐 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는 무엇을 숨기지 못했다. 맑은 물 속을 들여다보듯 서로가 서로를 잘 알았고 가끔씩 혼자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가도 참지 못하고 털어놓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각자 방에서의 개인생활보다는 공동생활 위주였고 지금까지 한 방에서 다섯 명이 함께 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친구들이 ‘이상한 가족’이라고 놀려댈 정도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변화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소한 질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어디에 있느냐, 교통편은 어떻게 되며 전화번호는 몇 번이냐 등 여러 가지를 물어 보시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하며 이유를 물어도 아버지는 대답 대신 뜻 모를 미소만 지으실 뿐이었다. ○○은행 통장은 있느냐, 새로 통장을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 하느냐 그런 질문을 하실 때의 아버지는 들떠 있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막연히 짐작하곤 했다. 올해 5월 정년 퇴직을 하셨던 터라 다른 곳에 취직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당신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 하셨고, 우리 또한 더 자세히 여쭤보지도 않았다. 새로 하실 일이 자식들에게 내세울 만한 직업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고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를 위한 배려라고 여겼다.

그 후 아버지는 몇 차례 국민연금관리공단을 다녀오셨다. 아버지 연세에 국민연금관리공단 정식직원으로 취직하실 리 없다는 생각에 궁금증이 생겼지만 나는 아버지의 일관된 침묵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정년퇴직을 하고서도 남들처럼 편히 지내지도 못하시고 우리 삼 남매를 위해 재취업을 하시려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외출에서 돌아오던 나는 대문 안에 놓인 우편물을 발견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보낸 두툼한 봉투였다. ‘아! 아버지께서 드디어 취업을 하셨구나’하는 반가운 마음으로 뜯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취업 통지서도 아니고 취업이 안돼서 미안하다며 다음 기회에 또 지원하기를 바란다는 얘기도 아니었다. 바로 아버지 명의의 국민연금에 관한 내역서였다. 자세히 읽어보니 소급분으로 십여 만원 그리고 석 달에 한번씩 일년에 네 번 사십여 만원씩 지급된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았다. 평생 자식들 때문에 단돈 만원을 비밀스럽게 가지지 못하셨던 아버지께서 인생의 마지막 비밀 주머니로 국민연금통장을 가지신 것이었다. 누구는 비자금으로 수천 억을 챙기기도 하고, 그 돈으로 외국에 몇십 억 짜리 별장을 사기도 한다지만 아버지의 비자금은 그렇게 빈약하고 초라했다. 부모는 껍데기만 남는다고 그랬던가. 알맹이를 하나하나 우리에게 나눠주고 빈 껍데기로 남은 우리 아버지. 남들에게 인사 받기보다는 달려가 먼저 고개를 숙여야했던 아버지의 십여 년간의 직장생활. 그런 아버지에게 작은 액수지만 그래도 국민연금통장이 생기셔서 다행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부자 아버지를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남의 아버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부럽다면 아버지 연세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젊음을 유지하는 분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지하철에서 흰머리가 희끗희끗한데도 젊고 건강해 보이는 분들을 만나면 나는 부럽다 못해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송한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도 저렇게 근사한 옷차림과 건강한 젊음을 되돌려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분들을 한참동안 바라보고는 했다.

이제 아버지만의 비밀스런 통장을 가지고 날마다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흐뭇해하시는 아버지를 볼 수 있어서 나는 기쁘다.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 모두는 신문지로 싸서 장롱 위에 숨겨져 있는 아버지의 비밀 통장에 대하여 알고 있다. 그 통장에 육십여 만원이 두 번에 걸쳐 입금되어 있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다. 노년에 접어들어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아버지의 마지막 비자금. 당신만의 그 비밀스러움을 마음껏 즐기시라고.

자식이란 부모의 울타리라고 했던가. 당연히 부모님의 노후는 우리 3 남매의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신문기사로나 접할 수 있었던 국민연금이 우리를 대신하고 있다. 많은 액수로 아버지와 우리 가정에 도움을 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그 통장으로 위안을 얻으시고 그 통장 때문에 또 얼마나 당당해지셨는지.

나는 아버지에게 그런 여유를 선물한 국민연금에 감사한다.

아버지는 아직까지는 자식들에게 부담 줄 나이가 아니라며 용돈을 내미는 우리의 손을 거절하신다. 그리고 어머니 앞에서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당신께서 만약 먼저 세상을 뜬다해도 걱정 말라고 하시며 큰소리를 치신다. 국민연금을 받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배우자인 어머니가 지급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아버지에게 단순한 돈이 아니다. 물질적인 혜택보다는 삶의 여유를 갖게 만든 '마음의 보약'인 셈이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는 당신을 위해서 그 돈을 한푼도 쓰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약주 한 잔 흥겹게 걸치고 오셔서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꺼내놓고 자랑하시리라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 이제 그 돈만은 저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당신을 위해서 쓰세요. 그것은 온전히 아버지의 몫이니까요.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