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제7회, 우수상)비파나무와 나의 국민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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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부서
- 홍보실
- 등록일
- 2007/04/13
- 조회수
- 2523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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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의 삶이 계속되는 한우 축산파동, 농산물 가격 하락 등으로 우리 집안의 경제는 너무나 어려웠었다. 그러나 다행히 농사일과 더불어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린 게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렵게 학교 졸업하고 외지에 나가 생활할 수 있었는데도 독자에다 나이 드신
부모님만 남겨두고 도시 생활을 할 수 없었기에 부모님 곁에서 농사를 짓기로 결정 했었던 당신!」
그로 인하여 가까운 이웃마을에 살고 있는
나와 연애 끝에 친정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내 남편의 늦은 군 입대, 큰 아이
출산, 가정을 이끌어 가야하는 막중한 책임감에 어린 딸을 업고 밭일과 집안일 늙은 시부모님 수발까지 혼자 모든 일을 처리 해야만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3년의 시간이 지났고 내 남편은 제대를 하였다. 제대 후 젊은 마음에 이것저것 안 해본 농사일 없이 다해 봤지만 소용없는 일. 그래도
우리 애들 4남매는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집 뒤켠에 심어 있는 비파나무를 벗 삼아 나무에 오르기도 하고, 비파가 익으면 따먹기도
하면서.
큰 아들이 태어난 날 애들 커가면서 따먹을 수 있게 내 남편은 비파나무와 포도나무를 심어 주었다. 요즘같이 먹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던 때라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계절이 되면 그렇게 좋아 할 수가 없었다.
비파나무와 포도나무에 열매가 맺기 시작하면 매일 매일
얼마나 자랐는지 몇 개나 열렸는지 확인하고 종이로 겉을 싸기도 하면서 아빠의 사랑을 확인이라도 한 듯 그렇게 비파나무와 벗 삼아 무럭무럭
자랐다.
애들 4남매가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 ‘92년 2월 내 남편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몇 일간 의식 없이 혼수상태에 있던
내 남편은 깨어났고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겨야 될 것 같아서 부랴부랴 짐을 싸고 애들만 남겨두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입원해
있는 몇 달 동안 집안일과 가게 보는 일은 애들 4남매가 번갈아 가면서 하였고 아빠의 병원 입원으로 애들도 많이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잘
지내 주었다.
다행히도 내 남편은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조금씩 차도를 보여 많이 완쾌가 되어 갔다.
애들만
남겨두고 서울에 있는 나와 내 남편. 내 남편은 매일 애들과 통화 하면서 애들과의 사랑을 확인하였고, 나아야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해서인지 몸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내 남편은 이제는 나 나았다면서 서둘러 애들이 있는 제주도로 내려가자고 재촉하기 시작하였다. 불안한
마음과 그래도 의사선생님이 곁에 있으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좀 더 병원에 있으려고 하였으나 내 남편은 병원에 오래 있으면 더 환자 될 것
같다며 막무가내로 퇴원을 원했다.
이렇게 몇 개월간의 병원 생활을 접고 애들이 있는 집에 도착하였다.
4남매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
완쾌되어 돌아온 아빠 모습.
곁에서 아빠?엄마 얼굴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애들은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그 후 내 남편은
건강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기 시작하였다. 음식조절, 운동, 금연, 금주 등 한번 죽었다 깨어난 새 인생이라면서.
그렇지만 내 남편은 몸은
정상이라지만 힘든 농사일은 무리였다. 구멍가게를 하고 있던터라 혼자 주말을 이용하여 농사일을 해 보았지만 농사일이 주말만 해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나 혼자 농사일은 무리인 것 같아서 그 이후 농사는 포기하고 안 짓기로 하였다.
다행히도 구멍가게에서 나는 수입으로 넉넉지는 않았지만
애들 학비랑 생활비는 할 수 있었다. 주말에는 남의 일도 도와주면서 .
내 남편은 비록 힘든 일은 할 수 없었지만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조언자요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애들에게는 전보다 더 자상한 아빠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작은 행복이 지속 되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내
남편은 조금씩 힘들어 하고 자리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래도 정기검진도 받고 있고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던 터라 괜찮겠지 하고 나도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좀 걸리는 게 있다면 그 당시 내 남편은 정기검진을 받을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했다. 고생하는 내게 미안하고 경제적 부담을 주기 싫어서 검진 날짜를 계속 미룬 것이었다. 그 사이 내 남편은
몸속에서 암을 키우고 있었고, 아프고 힘들어도 혼자 참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우리 가정에 암울한 앞날이 오리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97년 정월명절 내 남편은 명절차례를 지낼 수 없을 만큼 힘들어 했고 그때야 뭔가 불길한 예감에 병원을 찾았다. 폐암 말기.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찾아서 우리 부부는 애들만 집에 놔두고 또다시 서울로 향했다.
각종 검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고 내 남편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고 힘들어 했다. 그러나 내 남편은 그때까지만 해도 예전처럼 다시 건강해지겠지 하고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 후 검사 결과는 역시
암 말기로 가망이 없다는 의사 진단이 나왔다. 앞이 노래지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는데 앞으로 세상을 혼자 애들과 살아갈 생각을 하니 두렵기 그지없었다. 내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데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루 이틀 미루다 결국 내 남편도 이 사실을 알아야할 것 같아 의사선생님의 힘을 빌기로 했다. 그날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의사선생님이 진단 결과에 대하여 내 남편에게 직접 얘기를 하는 동안 내 남편은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그렇지 않다고 다시 검사해 달라고 아직
애들과 보내야 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면서 좀 더 오래 살 수 있게 해달라면서 울부짖던 내 남편. 결국 나는 내 남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의 무능력함에 많이 울어야 했다. 내 남편은 그 후 2-3일이 지나 내게 제주도 애들 있는 데로 빨리 가자고 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받아 들였는지 내 남편의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짐을 꾸리고 제주에 있는 병원으로 장소를 옮겼다. 내 남편과 매일같이 전화를 주고받는 사랑하는
애들이 매일 같이 병원을 들락거렸다. 아빠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이야깃거리를 들고서.
내 남편은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져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
암말이 환자는 고통이 심하다고 하여 걱정을 많이 했지만 내 남편은 고통스러워하질 않았다.
어느 날 내 남편은 마음의 준비를
하였는지 애들 없을 때 주변 얘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내게 지금까지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앞으로 더 고생을 시키게 되어 또
미안하다고. 당신과 애들 놔두고 저 세상으로 갈 생각에 가슴이 미어질 것 같다면서. 그때 내 남편은 한 가지 당부도 하였다.
집 뒤켠에
심어져 있는 비파나무를 절대 베지 말라고. 애들이 커서도 아빠가 선물한 사랑나무로 기억되게 잘 관리해 주도록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해준게 없다면서 국민연금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조금씩 연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는 얼마 후 집에 가고 싶다고 하여 집에
간 날 내 남편은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애들에게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비파나무 얘기를 하였다. 필요 없다고 나무를 베지
말고 잘 관리 하라고. 나무를 보면서 아빠 생각도 조금씩 해주라고 하셨다고. 그리고는 연금에 대하여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딸이 서랍 정리를
하다가 국민연금가입 증서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해당 공단으로 확인 해 본 결과 서류를 준비하여 신청하면 된다기에 애들이 연금 청구도 하였다.
연금을 청구는 하였지만 반신 반의. 계속적으로 지급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나는 꼬박꼬박 말일이 되면
어김없이 “국민연금”이라고 찍혀서 내 통장으로 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후 나는 통장에 국민연금이라고 찍힌 글자와 돈을 확인코자 말일이면
농협을 찾았다.
내 남편이 내게 남긴 말 중에 나중에 연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던 게 이렇게 직접 현실이 되고 보니 믿기지가 않았다. 달
달이 입금되는 연금은 내게 엄청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때까지 공부하는 애들에게 아빠대신 용돈으로 주게 되었고, 애들 졸업하고 나선 병치레가
잦은 내 병원비로 쓰고 있다.
내 남편이 몸이 안 좋아 경제력이 없었는데도 지난동안 꼬박꼬박 연금을 납부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애들은 내가 어려운 시기에 유족연금을 받는 걸 보고 국민연금의 전도사가 되었다. 국민연금에 대한 언론의 안 좋은 보도를 하여도
일방적 부정이 아닌 내가 연금을 받고 있는 현실에 더 신뢰를 갖고 있다. 그리고 내가 받는 연금으로 인하여 최소한 자기의 노후나 위험에 대한
대비는 살면서 해야된다는 산 경험도 심어 주었다.
오늘도 노랗게 익은 비파를 따서 애들과 먹으며 애들 아빠 얘기를 하였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셨으면 애들 시집 장가 보내고 우리 부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한창 어려운 시기에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당신.
나에게 내 남편 사망 후 지급되어지고 있는 연금에 대하여 내 주위에 모르는 이가 없다. 얼마나 연금이 필요한지 얼마나 내게
중요한지를 내 입을 통해 홍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연금을 납부하고 있거나 받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 나는 언론의 국민연금 보도에도 무척 관심 있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내가 현재 받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좋은데 왜들 안
좋은 생각들을 할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되어 간다.
집 뒷켠에 심어져 있는 비파나무를 보며
애들에겐 비파나무를, 내겐 달 달이 당신이 주는 것 같은 연금을 남기고 간 당신의 마음 씀씀이에 이제 나도 더욱 건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 유족연금이란
①국민연금 가입 중 사망
②국민연금가입기간이
10년이상 가입자이었던 자 사망
③국민연금 상실자가 가입중 발생한 질병 또는 부상으로 가입중 초진일이 있고 초진진단일로부터 또는 자격상실후
1년이내에 초진일로부터 2년이내에 사망한 경우
④노령연금, 장애연금(1급~2급) 수급권자의 사망
⇒ 가입자 또는 가입자이었던 자의
사망당시 그에 의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유족(법63조의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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