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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여고 2년 김슬기
최근에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중요한 이슈들 중의 하나가 바로 국민 연금에
대한 찬반 양론이다. 어쩌면 매일 뉴스 시간에 나오는 어른들의 논쟁에 가까운 토론이 이제는 좀 식상하게 보이고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우리집은 지금, 어려운 경제적인 문제의 한 복판에 서 있게 되어, 그런 문제에 관한 한 신경이 곤두서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째, 우리집에 국민연금 때문에 적지 않은 분란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연일 연금공단에서 보내는 독촉장이 날아드는
것이 익숙한 광경이었다. 늦게 학교에서 귀가하면 출입문 앞에 수북히 쌓여 있는 독촉장을 아빠 모르게 치워 버렸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이었다. 붉은 글씨로 ‘차압’이니 ‘압류’니 하는 글씨가 쓰인 독촉장을 쥐고 견디다 못해 나는 아빠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빠
도대체 국민연금공단은 왜 정말 짜증스럽게 이런 압류장을 보내고 난리야? 아빠는 지금 연금을 넣고 있는 거야, 안 넣고 있는
거야?” “...글쎄다. 어느 놈이 넣고 싶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슬기야, 너도 알다시피 지금 원자재 값도 내지 못해 기계가
끌려나가는 판에 연금을 넣을 돈이 있겠니?......정말 힘든 세상이네....무슨 세상이....” “.....”
아빠의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에 나는 뭐라 대꾸할 말도 잊은 채, 공장 한 쪽에 마련된 미니 가리개를 열고 나만의 공간으로 몸을 처박아 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국민연금에 대한 문제는 멀리서 그 예를 찾아 볼 필요도 없는, 우리 가족의 목을 옥죄는 절체 절명의 과제이기도 했다. IMF 이후로
아빠의 사업이 매년 고전을 면치 못하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국민연금’이라는 단어는 행복의 파랑새가
아니라 불운을 암시하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마냥, 목을 옥죄는 저승사자의 손길 같은 음침한 단어였다.
최근에 활발히 전개되는
‘국민연금반대운동’ 이라든가 또한 반대 주장들을 볼 때면,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연금제도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를 표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너무 어려워 더러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짓기도 하고, 더러는 공단과 정부를 욕하면서 자존감을 포기한 듯한 아빠의
표정들을 보면서, 도대체 뭐가 뭔지 모두가 의문에 휩싸이는, 심리적인 혼란 상태를 한참 동안 가지기도 했다. 아빠의 심기를 이해하여, 우리
가족에게 또 하나의 고통을 보태고 있는 국민연금제도 자체를 비난하자니, 학생으로서 건전한 판단력에 대한 요구가 나의 마음을 떳떳하지 못하게 하고
있고, 선뜻 옹호하자니 현실적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계신 아빠를 더욱 낭떠러지로 몰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을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마음을 자신도 모른다’는 말을 그 전에는 남의 얘기로만 들었는데 최근에는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체감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무척 나이가 든 느낌이 들기까지 한 것이다.
공교로운 일이었을까? 학교로부터, 국민연금에 대한 글짓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전에도 몇 번 문예대회에 입상 경험이 있던 나로서는, 이번 기회에 공부도 할 겸, 한번 국민연금에 대한 나의 생각을 써 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나는 우선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민연금관리공단’의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모으는 작업을 시작했다. 작년에 입상작을
보니 모두가 나의 가슴에 와 닿는 소중한 내용들이었고, 어떤 내용은 우리 가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은 진솔한 감동을 주는 작품들도 있었다.
국민 연금의 유래, 목적, 종류 등에 있어서는 기존 자료에 많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내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던
점은 ‘왜 하필이면 국민연금 제도를 이렇게 정부가 나서서 반강제적으로 실행하고자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본 글에서 나는, 우선
개괄적으로 국민연금 전반에 걸쳐 중요한 점과 문제점들을 짚어보며 윤곽을 잡아 본 후에, 좀 더 깊이 ‘반강제적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민연금에 대한 논쟁의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작금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민연금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다분히 그 절대적인 명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론적인 문제에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국민연금에 대한
문제가 마치 선과 악의 대립이나, 노사간의 갈등이나, 각각의 이익 집단들끼리의 첨예한 대립의 모양으로, 국가와 시민들 사이의 갈등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 어쩌면 좀 씁쓸함을 주게 하는 것 같다. 우선 국민연금의 근본적인 취지를 지적해 보고, 최근에 활발하게 논쟁이 되고 있는 그 이유들을
밝혀보면 그 해법에 대한 물꼬를 찾아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안티 국민연금, 또한 개인이나 각종 시민 단체 등에서도 그 근본적인 국민
연금의 취지에는 반대가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최소한 어떠한 격렬한 논쟁들도, 그 속에는 부인할 수 없는 당위적인 측면을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대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국민연금은 노인문제의 심각성을 해소하는 데에 직접적인 목적이 있다고 본다. 노인 문제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긴급한 것일 터이고, 다음으로 건강문제, 마지막으로 소외의 문제 등이라고 본다. 국민연금은 이런 크게 구분된 세 가지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조사는 퇴직 후 자녀에게 의존하는 경우라고 말한 노인이 60%가 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는 노인이 경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경제권이 없을까? 그것은 재산권을 자기의 아랫대에게 이관했기 때문이거나, 조금의 재산도 남기지 않고 전부
자식을 위해 소비했기 때문일 것이다.(우리 할머니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국민연금은 의무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이런 우리나라의 전통적 면모의
패러다임에 큰 버팀목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건강의 문제는 역시 경제적 문제와 연관된다. 질병에 대한 대비도 마찬가지로 경제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외의 문제도 경제권과 연결된다. 수입이라는 무대의 주연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역할이 축소되고, 보람을 찾을 일이 없으며,
경제적 소관조차 없으면 노인의 소외는 극에 달할 것이다. 은퇴 후에 수령하는 연금은 최소한 이 점을 보완해 줄 것이다.
다음으로,
국민 연금은 사회적 관점에서, 사회적 통합을 실현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유층과 고소득자들에게 있어, ‘더불어 사는
의식’이 적극 필요한 시점이다. 현대사회에서 요구되는 개념인 ‘부의 재분배’ 역시 이런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개인의 부와 명예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전체에게서 나온다면, 그 결과물인 부의 축적에 대해서는, 당연히 원래의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입의 정도에 비례한, 다소 높은 비율의 보험료 납부를 ‘피해’의 관점이 아닌 ‘공생’의 차원에서 수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민연금의 필요성은 대두된다. 국민연금은 개인과 사회, 또한, 전체 국가를 연계적 관점에서 파악하게 한다. 이
‘국민연금’이라는 제도는, 개인의 이득이나 부의 생산과 같은 개인적 차원의 부에 관련된 개념이 아니라, 개인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신뢰의 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복지국가의 표방개념인 “복지사회”는 국가적 관점에서 국민연금을 설명하는 데에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지사회는 시민의 삶의 질과 생활의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이다. 또한, 재산의 재분배 쪽으로 방향을 지니는 사회일 것이다.
‘사회 보장제도’는 복지사회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사회보장제도’의 예들은 바로,
의료보험, 국민연금, 산업재해 보상보험, 고용보험 등이다. ‘국민 연금제도’는 가장 세계적으로 강력하게 시행되는 사회보장 제도의 예들 중에
하나라고 본다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국민연금 제도는 개인의 문제, 사회적 문제, 국가적 과제가 큰 조직의
그물 망처럼 연결된 ‘전체로서의 하나’인 국가의 핵심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사회, 국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적인 조직인 것이다. 국가란 조직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여러 식물들이 생육하는 푸른 초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간단히 논의했지만 국민연금의 필요성을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적 관점에서 설명해 보았다. 이제, 국민연금을 국가가 나서서 이렇게 강력하게
시행해야 하는 이유를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볼 것이다. 국민연금은 시민의 완전한 자유의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그 답은 유감스럽지만
No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적 무한 욕망을 가진 개인들이 미래를 위한 희생을 수용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첫번째로,
국민연금은, 개인적 ‘삶의 설계에 대한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해야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일종의 노후에 대한 연금의 차원이므로 이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적 사항에 속하는 것이라고 우선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은행에 통장을 개설할 때에 자유 적립식 통장을 개설하는가,
아니면, 적금통장을 개설하는가의 차이와 유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근로자가 있다치자. 이 사람은 매월 적금보다는 돈이 생길
때는 많이, 돈이 부족할 때는 적게 입금할 수 있는 자유 적립식 통장, 혹은 자유 입금식 주택부금 통장 등을 선택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국민연금은 이러한 통장의 선택에 대하여 정기적금 통장을 개설하도록 국가가 강제하고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노후 설계 방법을
강제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것이 현재의 논란의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은 ‘자유권에 얼마나, 어떻게 강제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또한 어떤 노후의 삶을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즉 개인의 삶의 설계를 국가가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문제라 자못 복잡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여기에 ’지도적인 보호‘라는 개념이 들어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국가는 ‘부모인 위치’, 혹은 ‘보호자적 위치’를
가지고서, 그 국민에 대해, 고도의 바람직한 가치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미성년자들이 하기 싫은 일이
있어도 부모가 반 강제하며, 학교 적금 통장을 만들어 준다든가, 어떤 문화, 학습 프로그램을 추천하며 입학시킨다든가 하는 ‘지도적 조치’와
유사하다고 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자유와, 국가의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강권’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논쟁의
핵심이라고 본다. 장기적이고 안정된 노후의 삶을 위해서는 우선 내키지 않지만, 사회적 방호막인 국민연금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
동의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시적이나마,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고 때론 궁핍한 개인들에게 노후를 위하여 저축을 강제로 하도록 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보호적 차원, 바람직한 방향을 위해 지도자의 미성숙자들에 대한 지도적 개입이라는 점에서 납득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부정적 입장을 개진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개인이 원하지 않는데 그 방향이 설사 옳다고 해도 강제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지혜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을 향한 나방의 비행’이라던가, 영주가 농노들에게
멀리 가서 돌아올 만큼의 땅을 소유하라고 했을 때에 ‘회귀할 수 없는 과잉질주’를 하는 어리석은 일꾼의 입장과 유사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받고 있는 ‘교육강제’는 바로 이러한 넓은 의미의 자유권의 일시적 유보와 위탁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인간은 누구든지 현실적, 순간적 쾌락과 부유함, 안정감을 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국민연금은 이러한 현실적
욕망을 유보시킬 것을 강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인간 본성에 해당하는 욕망을 강제하는 것을 우리는, 우리 사회 여러 측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빠듯한 월급쟁이의 급여에 있어서 공제사항들이 그렇고, 의료보험이 그렇다. 또한 종교적 관점에서 교회나 몇몇 종교에서도 볼 수
있듯이, 헌금이나 헌납의 원리가 그렇다. 고도의 종교적 가치에서 비롯되는 십일조 헌금이 여유가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의
가치가 현실적 가치 세계를 능가함으로써, 개인이 경제적인 욕망을 스스로 유보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들이 너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도 헌금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런 ‘자유에 대한 유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적극적 가치를 위해
얼마만큼, 어느 정도까지 개인의 자유를 유보시킬 수 잇느냐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인간 개개인의 궁극적인 가치판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개인들은 ‘예상되는 최고의 조건’을 바탕으로 삶을 설계하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에 닥쳐올 불행에 대비해, 미리
자기의 순수한 의지로 보장성 저축이나 연금에 들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행에 대한 대비는 모든 사람이 인식하고 있지만,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곤란한 상태에 빠진 가장이 가족들을 위한 보험이나 적금을 스스로의 의지로 넣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답은
‘No'일 것이다. 가까운 예로, 우리집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사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쌀 한 포대를 사야하고, 끊어진 전기와
수도를 이어야 하는데 정기적금은 ’언감생심‘인 것이다. 국민연금은 이런 도저히 불가능한 개인의 삶의 모형에 대한 욕망에 ’의무‘라는 ’쓰라린
복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새롭게 한용운님의 시가 생각난다. “복종하고 싶은 데에 복종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어떨까? 고통스런 복종이
새로운 삶을 약속해 준다면 원하지 않는 복종도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살을 에이는(고통스런) 행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거기에 따른
고뇌는 어쩌면 겟세마네 동산에 이뤄진 예수의 기도문을 떠올리게 할 만큼 강렬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국가 사회를 믿고 어렵고 고통스런 요구를 수용했을 시에, 새로운 삶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임을 믿어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 복잡한 국민연금에 대한 논란에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를 나름대로 어설픈 논리로 표현해 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 좀더 넓은 범위로 회귀해서 국민연금이 바람직하게 정착하기 위해서 국가,
사회, 개인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지를 말해 보려 한다.
첫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이 우리 사회에
묵시적이나마 공감대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적게 가진 자, 사회적으로 약한 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사회에서 절대 약자가 존재한다. 경제능력이 없는 사람, 보호능력이 없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류의 구성원을 그 조직인 국가는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에는 가진 자, 상대적으로 유복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면이 분명히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유복한 사람은 연금을 넣지 않아도 얼마든지 보험적 성격의 적금이나 각종 보험에 가입할 수
있으며, 전혀 아쉬움이 없는 입장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복지 사회의 근간인 ‘부의 재분배’ 차원에서 큰 이익이 없지만 국가의 요구에 따라
순응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는 ‘예측불허의 인간 사회’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장애자의 80%가 후천적 장애자라는 통계가
있듯이, 인간의 불행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어떤 인간이 정상적 상태라고 해서 내일도 정상적 상태일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경우가 약자에게서 발생한다면 그것은 곧 걷잡을 수 없는 개인의 파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강자에게는 동일한 불행에도 재기의
탈출구가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는 이러한 개인의 자유의 유보로 인한 결과물인 연금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떠맡아야 할 중대한 책임이다. 연금의 관리에 대한 문제와 정책
집행은 중요한 문제이다. 최근에 뉴스 상에 보도된 것처럼 지나친 높은 수령액의 산출과 비효율적인 관리로 인해, 기금이 머잖아 고갈되고, 낭비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령액을 너무 높게 잡아 몇 년 후에 연금이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은 심히 국민연금의 시행에 있어 우려감을
준다. 많이 수령하는 것이 나쁠 것이야 없지만, 전체적인 균형 감각적인 저소득층의 입장에만 초점을 맞추는 듯한 인상은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실 논리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연금 수령 수준이 일반 다른 연금보다는 3-4배정도 유리하다는 얘기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현재의
수급 비율에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현재 수령자에게 많은 이득을 주기 위해서 차후 수령자에게 손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최대의 많은 국민을 위해서 최대의 이익을 주는 정책을 집행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되어야 할 부분은, 국민연금 제도에
있어서 일반국민이 불신을 가지고 있는 부분, 선뜻 동의를 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있어서는 대 국민적인 홍보와 설득, 또한 타당성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특성상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반응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 반응들의 이해와 공감이 중요할 것이다. 먼저,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발생하여, 넣었던 불입금에 대해, 막대한 연금을 수령할 경우를 가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형편이 좋은 사람이든 안
좋은 사람이든 일반적 반응은, 매우 만족하며, ‘국가에서 시행하는 제도이니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어야지...’라는 식일 것이다. 자신의 수령액이
너무 과도하다고 공단에 수령금을 반납하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 경우가 문제이다. 그것은 비교적 형편이 좋은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인데, 즉 능력 있는 부부가 직장을 같이 다니고 같이 국민연금을 넣었을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젊을 때부터 연금에
가입하여 62-63세 경에 불행한 일로 세상을 떴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에는 사적인 보험에 가입했을 때보다 ‘손해’가 되는 느낌을 분명히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65세 이후가 되면 유족연금이든 노령연금이든 하나만 선택해야 함으로써, 죽은 사람에 대한 납입액에 대해서는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티 국민연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부분은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편 생각해 보면, 여러 종류의
일반 보험 등에서는 납부금을 거의 찾을 수 없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물론 나의 공부가 모자라서 좀 모르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부분이 국민연금이 가진 ‘달콤한 고통’에 해당하는 면일 것이다. 즉 장미의 향기에 들어있는 다소의 ‘가시의 고통’인 셈이다.
이 때의 반응은 아마, 상당히 피해의식을 느끼면서 ‘손해를 봤다’라는 것일 것이다. 물론 나의 주변에 큰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외가 쪽으로 어떤 분이 국민연금에 가입한지 3개월이 지나 농촌에서 경운기 사고로 50대 중반에 돌아가셨는데 유족인 할머니가 벌써 10년 넘게
연금을 받아서 큰 어려움 없이 살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 정말 고맙고 다행스럽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정작 가입자 본인은 ‘국민연금에 가입했는지
아닌지’ 조차 몰랐는데 나중에 공단에서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와 모든 국민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즉, 소득이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내 몫을 다 못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정말 힘든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가서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보람을 느끼는 것일 것이며,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만약의 경우에는 엄청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 것이다. 둘째는, 소득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자기가 넣은 만큼만 나중에 찾아가는 ‘자기 팔 자기 흔들기’ 만 하면 될
것이다. 답은 간단한 것이다. 후자에는 ‘복지국가’ 혹은 ‘더불어 살기’, ‘부의 재분배’의 개념은 없는 것이다. 가진 자에게는 힘겨운
선택이지만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야속한 발상일지는 모르나 좀 더 소득이 있는 사람들을, 이 ‘공적 부조’에
어떻게 설득을 하며 그들에게 ‘자유 의지적’ 참여를 유도하는가가 관건인 것 같다. 너무 섬뜩한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장기이식’의 개념이
생각난다. 삶을 마감하는 사람의 장기가 타인에게 이식되어 꺼진 불을 밝히는 새로운 생명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장기 기증을 준비한 사람도
그 의미를 의식했겠지만, 기증 받은 사람은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이다. 국민연금에 이렇듯 깊은 의미를 부여해 보니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쓰다보니 너무나 길고도 긴 푸념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씁쓸한 생각도 든다. 언젠가 공부하는
삼촌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자기가 쓰고 싶은 말이 명확하지 못할 때 사람은 길게 쓰는 법이란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이렇게 길게 쓰며
느낀 점은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변명하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은 두 분이 다 국민연금을 가입하여 차곡차곡 납부금을 낼 형편도 되지
않고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수혜를 더 받을 부류에 속하지, 남들에게 수혜를 주는 입장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의 부모님의 세대가 있듯이, 곧 우리의 세대도 펼쳐지는 것이다. 도움을 받는 자가 도움을 받을
자가 될 수 있고, 언제든지 그 반대의 상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훗날에는 나는 분명,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입장에 서보겠다고
또한 다짐하는 것이다.
다시, 4년 전의 일이 찡하면서 떠오른다. 한참 아빠의 사업이 힘드실 때였다. 당시에 우리 집에 증조
할아버지와 몇 십 년의 세월을 함께 하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신 이후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 한 달에 몇 십 만원씩의
지원금을 받으신 적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체납으로 인해, 전기가 끊어지고 보일러가 꺼진 처참한 상황이 생겼고, 내가 등록금 미납으로
인해 엄청난 창피함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할머니가 오셔서, 근 50만원을 내어서 전기와 보일러,
밀린 등록금을 해결해 주신 것이다. 정말 목이 메인 일이었다. 매월의 지원금을 할머니는 꼬깃꼬깃 아끼며 모아 두었던 것이었다. 우리 부모님과
나는, 그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씨와 ‘사회보장’에 대한 우리나라의 제도에 대해 적지 않는 감동을 받았다.
아빠는 근 십 여 년의
세월동안 허덕이며 끌어오시던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공장을 이제 정리하게 이르셨다. 명절 때마다, 온 친척들이 모여들어 회사를 그만 하도록 종용해도
고집을 꺽지 않으셨던 아빠였지만,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았다. 근 1년 동안 이곳 저곳 아빠는 직장을 찾아 옮겨
다니셨다. 더러 엄마의 볼멘 하소연이 방문 사이로 들리기도 했다. “어디 급여 명세서 찍힌 종이 한번 가져와 봐요.” “조금만 기다려
봐, 허 참..." 몇 달 동안 근무하시고는 출근하는 장소가 또 달라지던 아빠는 근 6개월 전부터 출근지가 고정이 되셨고 약속대로 급여
명세서를 가지고 오신 날이었다. 아빠는 나에게 몹시 어설픈 표정으로 물으셨다. “야, 슬기야, 너 국민연금
알어?” “그런데...왜요?” “아빠 이제 직장에서 국민연금 다시 시작한 거야...” “....” 나는 무척이나 아빠의
직장과 국민연금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터에, 나에게 그 말씀이 던져주는 효과는 엄청났다. 그 파장은 고동을 일으키며 짓눌려 있던 마음의 수면
위를 타고, 힘있게 넓은 바다 한 복판으로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집도 ‘국민연금’ 이라는 ‘꿈나무’에 다시 정성껏 물을 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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