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3회 우수상) 서울의 북단 한신마을에서
작성부서
홍보실
등록일
2007/04/12
조회수
2453
내용
제3회 우수상
서울의 북단 한신마을에서

강성수 / 서울 도봉구 도봉2동 장해연금 수급자

십사년전 장안평에서 도봉동 감나무집으로 이사할 때 살림살이를 반으로 줄이고 늙으막 인생을 여기서 마감하리라 다짐을 했다 .
자식들 출가시키고 두 늙은이 살기에 흡족한 생활공간이었다. 보이면 정원의 온갖 꽃들이 움트고 움츠렸던 목련이 꽃망울을 터 트리고 짙은 꽃향기를 풍긴다. 목련 꽃잎이 떨어질 무렵이면 감나무가 시샘이나 하듯 푸른잎을 들어내며 꽃을 피우고 싱그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우리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감나무 쳐다 보기에 여념이 없다. 달이 갈수록 감은 눈에 띄게 쑥쑥자라 어느덧 주먹크기만 하게 되면 추석이 되고 까치밥 한 두개를 남기고 감을 딸 때면 동지(冬至) 문턱에 다다른다. 나무에서 딴 감은 삼층 다락방에 열 개씩 줄을 지어 바닥에 펴놓고 무르익은 감부터 골라 겨울 간식 거리로 해왔다. 다락방 옆 서재에서 북녁으로 난 창문을 열면 동쪽으로 수락산 상봉우리가 치솟아 있고 서쪽으로서는 도봉산 만장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어 주말이면 밧줄에 매달린 암벽타기 등산가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 멋에 취하여 이집에 살기를 십사년...

그러나 지지난 봄 몸에 이상한 증세가 있어 서울외과 클리닉에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고 "악성직장암"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3차 의료원 의뢰서를 들고 한강변을 따라 서울 중앙병원으로 차를 달렸다. 마음이 착잡했다. 집도할 선생님은 40-5 0세쯤 되었으면.. 또, 중요한 것은 선생님의 손이었다.
칼잡이 노릇은 몇 년이나 했는지, 손가락은 여자 손가락 같이 부드럽고, 가늘고, 길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몸 속의 암덩어리 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라내고 밝은 눈으로 임파선을 따라 깊숙이 뿌리박은 암세포들 까지도 모두 제거하고 왼손, 오른손을 고 루 써가며 곱게 바르질 할 수 있는 의사라면..
한 옥타브 높은 음성으로,
"강성수님 들어가세요."

나보고 '님'이라 불러주니 좋기는 좋았다. 촌놈이 '님'자 칭호를 받다니..
진찰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 이거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한강변을 달리며 어떤 의사가 걸릴까 걱정했던 것이 한 순간에 다 풀렸다.
건강한 체구의 경상도 사나이, 맑은 눈동자, 환자를 사로잡는 경상도 사투리의 믿음직한 주변. 그러나 손가락만은 굵고 투박하 여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나이를 물어 보며 하시는 말씀.
수술을 받으면 살고 안받으면 죽을 때 무척 고생하며 죽습니다.
그러니 살고 죽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라는 뜻인가 보았다. 그래, 이 사나이를 믿고 내몸을 맡겨보자.
며칠 후 회복실에서 눈을 떴다. 무엇이 달라졌나 손으로 더듬어 보니 좌측 하복부에 두꺼운 거즈가 붙어져 있었다. 복부에 구 멍을 뚫었구나. 또 항문을 만져 보니 역시 두툼한 기저귀가 채워져 있었다. 직장과 항문을 제거하고 김진천 선생님이 작품을 만 드셨나 보다.

퇴원후 빈주머니를 복부에 차고 생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주위 사람들의 외면 과 냉대였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어쩌다 내가 전화라도 걸어 대화를 나누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어 버린다. 이 들은 내몸속에 있는 암세포가 전화선을 타고 자기 몸속으로 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가 보다.
35년전 오른쪽 신장을 절제한 상태에서 아무 탈 없이 여지껏 살아 왔으니 제3의 인생을 더 잘살아 보자. 그것도 정성과 최선 을 다해서...
삶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찾아서, 내가 개발해서, 내가 선택해서 사는 것이다.
라고 이성호 연세대 교수가 말하지 않았던가?

수술후 방사선 치료, 항암 약물치료를 받는 동안 국민연금 불입이 중단 되었음을 알고 국민연금관리공단 서울동대문출장소를 찾아갔다. 두서없이 횡성수설 떠드는 나의 말을 상담원을 귀담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국민연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친절한 분은 이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보는 것이다. 상담원의 자세한 설명에서 장해연금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장해연금지급신청 서류 수속을 받기로 했다.
심장, 신장, 호흡기, 대장, 직장, 방광기능 같은 내부장해인도 사회생활에 큰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법적 장해인에 포함시켜 장애인 복지에 대한 폭넓은 정책변화와 적용대상 범위확대를 실시해야 한다는 신문보도를 읽은 적이 있다.
장해진단서를 발부 받으려니 의사가 꺼려하는 눈치이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무슨 장해인이란 말인가 생각하는가 보다. 별 로 달갑지 않은 의사와 간호원의 눈치를 받으며 발급된 서류를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제출하고 회신 기다리기 두달이 지날 무렵 국 민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받은 회신은, 직장암으로 인공항문 성형수술 상태이나 동 질병의 특징상 질병의 고정성이 인정되지 않음. 초진일로부터 2년 경과후 청구바람.
이라는 통지문이었다. 나는 이 통지문을 읽고 또 읽어 보았다. 고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면 떼어낸 내 신장과 항문과 직 장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는 동안 해는 바뀌어 1996년 2월이 되었다. 수술 받은 후 2년만에 실시하는 정기검사를 받는 달이다. 다 완치되었으리라 믿고 받은 정기검사 결과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직장암 폐로전이
참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X-RAY, CT, 혈액검사를 다시 해봤다. 역시 폐로전이된 상태다.
처음 심사후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통보받은 고정성이 인정되지 않음이란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다시 직장암 폐로전이라는 장해진단서를 첨부해 장해연금 지급청구서를 제출했다. 꼬박 2년이 걸렸다. 몸은 나른하고 눈에 아른거리는 것은 죽음 뿐이었다 .
우선 내 인생은 복잡해서 간단한 것으로 정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우리둘이 살기엔 집이 너무 넓다. 주택을 반으로, 지출 을 반으로 모든 것을 현재의 반으로 줄여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내가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보 자.
생활을 반으로 정리하는 동안 또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편지가 왔다. 별로 달갑지 않은 내용이려니 하고 뜯어보는 순간 드디어 나도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6월 29일자로 발급된 국민연금 수급증서가 들어 있었다. 장해 1급이다. 사후중증제도가 적용되어 연금혜택을 받은 것이 다.
장해연금은 기본적으로 장해인정일(완치일 또는 완치되지 않을 경우 초진일로부터 2년경과일)의 장해정도가 장해등급에 해당될 경우 지급된다. 그러나 사후중증제도의 운용에 따라 장해인정일의 장해정도가 경미하여 장해등급에 해당되지 않았으나, 추후 악 화된 경우에도 예외적으로 장해등급을 인정하여 장해연금을 지급해 준다.라는 사후중증제도가 있는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변주머니가 복주머니가 되다니. 분기별 20일이면 내 통장에 어김없이 들어오는 국민연금이 있다. 어느 효자가 이같이 하여 주랴! 먼저 아내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친구들에게 알렸다
내 아내도 국민연금 지역가입자다. 1991년 8월 국민연금에 가입시킬 때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자기는 60세까지 살지도 못하고 죽을텐데 무엇하러 생돈 드리느냐 성화였다. 연금 부을 돈이 있다면 지금 당장 쓰고나 보자는 심사였다.
나는 아내의 환갑에 선물로 국민연금 수급증서를 주고 싶어 열심히 회비를 납부했다. 그러나 내가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 후 통 원치료 받는 동안 아내의 국민연금 보험료가 체납되어 자격이 상실되어 있었다. 아내는 국민연금을 해약하고 일시금으로 받겠다 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나 나는 체납된 몇 개월분의 회비에 연체료가 부과된 회비를 납부하고 다시 국민연금 회원 자격을 취득하여 주었다. 아내의 국민연금 불입 만기일은 1997년 1월까지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만기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199년부터 특례노령연금 수급대상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안에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반문을 한다. 나는 연금에 대해 아는 범위내에서 설명하고 꼭 연금을 받는다는 것 보다 내가 회비를 납부함으로써 복지국가 건설에 이바지 한다는 참여의식을 가지라고 말해 주었다.
건강도 잃고 직장도 잃어 무소득 상태인 나에게 연금이라는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이 금액이면 내가 늘 필요로 하는 변주머 니, 붙임대, 장세척기구, 병원 정기검사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이 돈은 내것이 아니다. 우리 국민연금 가입회원들의 피와 땀 의 결정체이다. 한푼이라도 헛되게 써서는 안된다.
1993년부터 노후생활보장을 위한 특례노령연금 수급권자는 4만 9천여명에 달하고 있다 한다. 또, 1996년 6월 현재 특례노령연 금, 장해연금, 유족연금 및 반환일시금으로 2조 5천억원이 넘게 지급되었다 하나. 천문학적 숫자다.
노령화 되어가고 있는 이때 우리 국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국민연금에 참여하면 국민이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 경제활동을 건실하 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을 나는 확신한다.
1996년 7월말 정기검사를 또 받았다.
몸통기능장애로 100m 이내의 활동만 가능함.
이란 판정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일어나 있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도봉동 감나무집에서 북으로 400m쯤 떨어진 곳에 한신마을이 새로 생겼다. 9월에 개통되는 7호선 종점 도봉산역과는 담장 하나 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이다.
간단히 정리하고 살기로 마음먹은 것을 실천하기로 했다. 무덥고 지루한 장마속에서 우리가 한신마을로 이사가던 날은 비가 끝 나고 살들바람이 불어주는 초가을 날씨였다.
집 현관 철제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 주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방은 아내 몫이다. 베렌다와 곁드린 방이 내 방이다. 방에 는 흔들의자와 침대만 놓고 베렌다를 공부방으로 쓰기로 했다. 좁은 공간이라 책 보따리를 다 풀 수가 없어 박스에 담긴 책들이 세상 구경을 못하게 될 것 같아 안타깝다.
거실에 단풍나무자리를 깔고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반듯이 누워 왼편으로 서너번 구르면 경기도 의정부 땅이다. 다시 오른편으 로 몇번 구르면 서울 도봉동이다. 굴러서 경기도와 서울을 왔다. 갔다 한다. 일어나 앉으면 등뒤에 도봉산이 위엄을 드러내며 장엄하게 서있다.
산 밑으로 경원선, 중량천, 노원마을이 있고 들에 있는 수백개의 비닐하우스에서 생사노딘 채소들이 서울로 실려나가고 있다. 중량천 뚝에는 더위를 피하는 늙은이들이 정자에 한가로이 전송용 철탑이 줄을 지어 선과 선이 고리를 물고 산업전선의 역군 노 릇을 하고 있다.
한신마을은 산과 산, 선과 선, 들과 강, 국철과 전철이 선(線)과 선이 고리를 물고 연결되는 선과 고리의 마을이다.

내가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 암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100m로 제약(制約)된 내 생활 활동무대도 조금씩 넓혀 나가야 한다 . 저 산마루 철탑에 흐르는 전기처럼, 냇가에 흐르는 시냇물처럼, 경원선을 달리는 천리마처럼, 나도 함께 달려야 한다.
그리고 이세상 모든 것과 고리를 물고 어깨를 나란히 어울려 서울의 북단 한신마을에서 힘차게 살아가리라.
병수발 들어주는 아내, 담당간호사와 의사선생님, 국민연금관리공단 임직원 일동, 그리고 국민연금 가입자 여러분께 뜨거운 감 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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